멜뀌아데스의 창고/사이
이병률, 시의 지도
Mealda
2014. 8. 12. 23:53
시의 지도
당신은 시를 모른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며 알아야 할 건 시 하나가 아니라 했다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계절의 문제
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바람과 나무의 문제로
나는 넘기려 했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
당신이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전화기를 들고 누군가와 내 이야기를 하는 듯하더니
이내 나를 험담하고 있었다
이것은 세상의 양면이 아니라 세상의 둥근 면
간밤에 시를 석 줄 쓰고 잤다가
아침에 시 넉 줄 지우고 외출하는 일과도 맞먹는
일이라며 넘기려 했다
당신보다 십 분쯤 늦게 도착하려고 멈춘 공원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뜨겁게 토하고
그도 모자라 손톱 발톱을 깎는 어린 운동선수들이
나무 밑에 모여 앉아 있는 저녁 공원
저 청춘의 미래에는 무슨 일이 생기나
시를 모른다 하더니 나조차 모르는 당신을 앞에 두고
많은 막걸리를 마시었다
내 얼굴을 가리기엔 막걸리 잔이 좋아서였다
넘기려 했으나 쓴 찻물처럼 넘겨지지 않는 시간을 넘기고
혼자서 다시 찾은 밤 공원
손톱이 어질러진 탁자 위에 차려놓은
이 행성의 냄새
-이병률, <눈사람 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