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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이성복,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1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짐 실은 트럭 두 대가 큰길가에 서 있고 그뒤로 갈아엎은 논밭과 무덤, 그 사이로 땅바닥에 늘어진 고무줄 같은 소나무들) 내가 짐승이었으므로, 내가 끈적이풀이었으므로 이 풍경은 한번 들러붙으면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른다 2 국도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노란 개나리꽃, 배가 빵그란 거미처럼 끊임없이 엉덩이를 돌리며 지나가는 레미콘 행렬, 저놈들은 배고픈 적이 없겠지 국도변 식육식당에서 갈비탕을 시켜 먹고 논둑길을 따라가면 꽃다지 노란 꽃들 성좌처럼 널브러져 있고, 도랑엔 처박혀 뒤집혀져 녹스는 자전거, 올 데까지 온 것이다 3 운흥사 오르는 길 옆, 산에는 진달래 물감을 들이부은 듯, 벚나무 가지엔 널브러진 징그러운 흰 꽃, 거기 퍼덕거리며 울음 울지 않는 것은 바람에 불.. 더보기
이성복, 다시 봄이 왔다 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의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