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썸네일형 리스트형 장석남, 폭설-山居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지가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없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하우스도 폭도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번쯤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더보기 부뚜막, 장석남 부뚜막 부뚜막에 앉아서 감자를 먹었다 시커먼 무쇠솥이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솥 안에 금은보화와도 같이 괴로운 빛의 김치보시기와 흙이나 겨우 씻어낸 소금 술술 뿌린 보리감자들 누대 전부터 물려받은 침침함, 눈 맞추지 않으려 애쓰면서 물도 없이 목을 늘려가며 감자를 삼켰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감자를 삼킨 것인지 무쇠솥을 삼킨 것인지 이마 위를 떠도는 무수한 낮별들을 삼킨 것인지 눈물이 떨어지는 부뚜막이 있었다 어머니는 부뚜막이 다 식도록, 아궁이 앞에서 자정 너머까지 앉아 있었다 식어가는 재 위의 숨결 내가 곧 부뚜막 뒤의 침침함에 맡겨진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나는 가만히 어머니의 치마 끝단을 지그시 한번 밟아보고 뒤돌아설 뿐이었다 마당 바깥으로 나서는 길에 뜬 초롱한 별들은 모든 서룬 사람의 발등을.. 더보기 방을 깨다, 장석남 방을 깨다 날이 맑다 어떤 맑음은 비참을 낳는다 나의 비참은 방을 깨놓고 그 참담을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광경이, 무엇인가에 비유되려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몰려온 것이다 너무 많은 얼굴과 너무 많은 청춘과 너무 많은 정치와 너무 많은 거리가 폭우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밝게 밝게 나의 모습이, 속물근성이, 흙탕물이 맑은 골짜기를 쏟아져 나오듯 그러고도 나의 비참은 또 다른 지하 방을 수리하기 위해 벽을 부수고 썩은 바닥을 깨쳐 들추고 터진 하수도와 막창처럼 드러난 보일러 비닐 엑셀 선의 광경과 유래를 알 수 없는 얼룩들과 악취들이 아니고 해머를 잠시 놓고 앉은 아득한 순간 찾아왔던 것이다 그 참담이 한꺼번에 고요히 낡은 깨달음의 話頭가 되려 한다는, 사랑도, 꿈도, 섹스도, 온.. 더보기 11월, 장석남 11월 이제 모든 청춘은 지나갔습니다 덥고 비린 사랑놀이도 풀숲처럼 말라 주저앉았습니다 세상을 굽어보고자 한 꿈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안 것도 겨우 엊그제 저물녘, 엄지만한 새가 담장에 앉았다 몸을 피해 가시나무 가지 사이로 총총히 숨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뒤였습니다. 세상을 저승처럼 둘러보던 새 이마와 가슴을 꽃같이 환히 밝히고서 몇줄의 시를 적고 외워보다가 부끄러워 다시 어둠속으로 숨는 어느 저녁이 올 것입니다 숲이 비었으니 이제 머지않아 빈 자리로 첫눈이 내릴 것입니다 눈이 대지를 다 덮은, 코끝이 시린 아침 나는 세상에 다시 나듯 문을 열고 나서고 싶습니다 가시넝쿨 위로 햇빛은 무덤처럼 내려쌓일 것입니다 신(神)은 그 맨몸을 흐르던 냇가의 살얼음으로도 보이시고 바위틈의 침침한 어둠으로도 보이시며 .. 더보기 여름숲, 장석남 여름숲 저만치 여름숲은 무모한 키로서 반성도 없이 섰다 반성이라고는 없는 綠陰뿐이다 저만치 여름숲은 城보다도 높이, 살림보다도 높이 섰다 비바람이 휘몰아쳐오는 날이면 아무 대책 없이 짓눌리어 도망치다가, 휘갈기는 몽둥이에 등뼈를 두들겨맞듯이 휘어졌다가 겨우, 겨우 펴고 일어난다 그토록 맞아도 그대로 일어나 있다 진물이 흐르는 햇빛과 뼈를 익히는 더위 속에서도 서 있다 그대로 거느릴 것 다 거느리고 날 죽이시오 하듯이 삶 전체로 전체를 커버한다 조금의 반성도 죄악이라는 듯이 묵묵하다 그건, 도전 以前이다 그래도 그 위에 울음이 예쁜 새를 허락한다 휘몰아치는 그 격랑 위의 작은 가지에도 새는 앉아서 운다 떠오르며 가라앉으며 아슬아슬히 앉아 여름의 노래를 부른다 새는 졸아드는 고요 속에서도 여름숲을 운다 城보.. 더보기 한겨울 목련나무, 장석남 한겨울 목련나무 싸락눈이 내렸는데 목련나무 가지에도 톡톡 부딪치며 내렸는데 목련나무 살 속에 숨은 창백한 햇살 한 올은 물먹은 흰 솜을 둘둘 말고 서서 발등의 싸락눈 녹이는데 시간은 이 몸이 차다고 외풍이 세다고 어느 깊이로 고개를 처박고 추억을 표백해 잎사귀며 꽃들을 빚고 있는가 -장석남 더보기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장석남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 가운데다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아니, 여러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장석남 더보기 水墨 정원 9, 장석남 水墨 정원 9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밤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장석남 더보기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장석남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殘像등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장석남 더보기 봄 저녁, 장석남 봄 저녁 모과나무에 깃들이는 봄 저녁 봄 저녁에 나는 이마를 떨어뜨리며 섰는 목련나무에 깃들여보기도 하고 시냇물의 말(言)을 삭히고 있는 여울목을 가슴에 만들어보기도 하다가 이도저도 다 힘에 부치는 봄 저녁에는 사다리를 만들어 모과나무에 올라가 마지막 햇빛에 깃들여 이렇게, 이렇게 다 저물어서 사다리만 빈 사다리로 남겼으면 봄 저녁 -장석남 더보기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