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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뀌아데스의 창고/도서

뜻밖의 좋은 일_정혜윤




나는 사실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는 '뜻밖의 좋은 '이라는 것도 실은 마음속으로 수많은 기다리던 것이란 .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지 좋은 일이 생기기 위해서 그전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P.26

 

물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이다. 정직과 진실을 향한 사람일수록 괴로워한다. 언어는 삶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P.40

 

나의 경우에 듣는다는 , 그것은 진실을 들을 아는 것이다. 안다는 , 그것은 적어도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 우리가 취하는 모든 동작은 의도하지 않은 자서전의 조각이고 모든 것은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종이에 가장 자세하게 글로 삶의 이야기만큼 진실한 것이라고 했는데, 경험상 말은 진리다. 나에 관한 진실은 내가 입으로 주장하는가가 아니라 무심코 하는 , 무의식적으로 하는 동작에 담겨 있다.

P.42

 

무겁기 때문에 가벼워지고 싶었다. 삶에 시달리면서도 가볍게 되고, 삶이 꿈이란 것을 알고 싶었다.

P.43

 

우리 인생 중간에는 세상이 엉망진창이라는 당혹감을 처리해야 때가 반드시 있다. 문제는 세상은 나만큼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란스럽기는커녕 질서가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질서가 부당하다는 것이다. 현실은 부당할수록 어쩐지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삶이 이렇게 우리를 끌어내리므로 우리에게는 붙잡고 위로 끌어올려줄 믿을 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지옥에서는 우리를 위로 끌어올려주는 것이 있어야 탈출할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은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균형을 잡되 하늘 같은 , 조금 높은 , 다른 차원에서 찾으란 말로 느껴졌다. 삶의 무게는 우리를 끌어내리는데 정신의 중력은 이와는 반대로 우리를 높으로 끌어올리 있어야만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환상 없이 보면서도 사랑할 있다면 좋을 것이다.

P.44-45

 

꿈은 간단했다. 내게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써야 할지 알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일을 하고 사는 것이었다. 모든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무거움과의 싸움이고 필요한 일을 하면서 산다는 느낌, 그것이 삶의 가벼움이라 생각했다.

P.46

 

지금 일어나는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미래를 만들어보는 것이 구원이란 것을 알고 있는 나는…

 

'희망은 이빨 사이에 깨무는 희망이어야 한다' 버거의 말을 이해한 것도 그날이었다.

P.52

 

우리의 삶이 누군가의 꿈이란 것을 알게 해준다.

P.53

 

그들은 용감하게 선택하고 댓가는 치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기억하자. 삶은 총합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한폭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란 것을. 그리고 지금 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이 떠오른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지켜주는 근거는 사랑이다. 나의 사랑은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다. 이에 근거해서 나를 만나라. 그러면 나도 강한 사람인 것을 알게 것이다. 남이 나를 비난하거나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마다 나는 지체 없이 이렇게 생각한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나의 정신에 의지하자.' 지금 나의 마음이 그렇다. 비록 사는 것은 못해도 사랑만은 잘해내고 싶다.

P.54-55

 

 

나는 인생의 모든 페이지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던 새하얀 페이지 위로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을 안다.

나는 꿈꿔본다. 나도 하얀 페이지가 있을까? 들어본 없는 이야기를 위해.

 

좋은 책을 읽은 독자는 멍해진다. 말문이 막히고 미래가 하얗게 된다. 잠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비우고 비운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면서, 새로운 것으로 채우면서 우리에게 좋은 일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눈으로 읽지만 두번째는 삶으로 읽으면서 가까운 미래에 전에는 없을 일을 있게  되더라도 전혀 놀랄 것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P.58-59

 

 

질문이 없다면 대답도 없고, 질문이 있다면 나은 대답은 가능하다는 또한 안다. 그리고 아는 것이 조금 있다. 내가 하는 말들이 공허할수록 삶도 그렇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를 닮고 우리의 삶은 우리 내면을 따라 흘러간다.

P.73

 

잊지 말자.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냉소주의를 통해서만 무기력을 이겨낼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세상이 썩었다는 것을 개탄하느라 썩지 않은 세상에 대한 책임과 해야 일은 이야기한다.

P.77

 

아니다. 한방에 가지 않는다. 수많은 시간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을 빌리자면 지켜보는 이도 없고 상벌도 없는 평범한 나날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고 잤으며 작은 시간들을 어떻게 쪼개 썼느냐에 따라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권위와 능력이 주어질지 정해진다. 지켜보는 이도 없고 상벌도 없는 평범한 나날을 내가 어떻게 썼는지는 결국 표면에 떠오른다. 마치 한방에 가는 것처럼 떠오른다.

P.84-85

 

'오늘이 인생 마지막 날이며 가장 아름다운 날이네.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과거에 나눴던 대화를 생각하면 영혼의 기쁨을 느낀다네.' 에피쿠로스는 삶은 불행하므로 기쁨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했다.

P.92

 

세상에 슬픔이 너무 많아서 한번의 기쁨이라도 소홀히 수가 없다. 한번만 기뻐도 하루 종일 기뻐할 있다. 요구하고 기뻐할 있다. 기쁨은 희귀하므로 웃음과 기쁨을 아는 사람이 가장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다. 기쁨은 오래가는 감사의 마음과 관련이 있다.

P.83

 

 

품위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깨끗하게 마음을 쏟을 알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조차 감사할 일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때문에 균형을 잃지 않고 자기비하에 빠져서 나약하거나 감상적인 넋두리른 늘어놓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미래를 살아라'라는 말을 이해할 있게 되었다. 미래를 사는 사람은 오늘의 삶을 미래의 눈으로 본다. 덕분에 희망은 앞으로 어떤 환상적인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나길 원하는 바로 일을 지금 여기서 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음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희망은 환상이나 보상이 아니라 인내와 끈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102

 

누군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자신과 삶을 바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P.103

 

인생에 다른 거창한 의미는 없다. 서로에게 잊을 없는 사람이 되는 말고는,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가볍게 하고 웃게 만드는 말고는. 그리고 그것이라면 내가 있는 일이 많다고 느껴진다.

P.104

 

우리는 뭔가를 잃어야 그것이 소중했음을 안다. 그래서 모든 순간은 소중하다.

P.105

 

마음속의 슬픔, 좌절감, 수치심, 무력함, 연약함이 역설적으로 앞으로는 한점 부끄러움 없어야 한다는 단호한 마음의 토대가 있다는 것을 그뒤로도 몇번이나 경험했고 내게는 발견이야말로 기쁜 일이었다. 극복된 좌절감, 극복된 두려움, 극복된 우울, 모든 극복된 것들은 삶을 기쁜 마음으로 살게 돕는다. 이런 일은 한번만 일어난다면 두번, 세번 연거푸 일어날 있고 또한 뜻밖의 좋은 일이다. (극복했다고 생각한 두려움도 언제든 다시 찾아온다. 그럼 또다시 극복하고 기뻐할 있다.)

P.110

 

우주에서 우리가 즐길 있는 따뜻함은 우리가 직접 만들어낸 따뜻함뿐이다.

P.116

 

우리의 문제는 혼자 수도 없고 함께 수도 없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시간과 , 운명을 누군가와는 나눠야 한다.

P.122

 

문제는 셰익스피어가 '템페스트'에서 나는 암흑의 존재를 나의 것으로 인정하오!라고 말한 것처럼 이것들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문제는 불평의 대부분을 만들어내게 바로 그것, 우리는 나약했다는 점이다.

P.124

 

정말, 이렇게 우리는 삶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을까? 정말 아끼는 사이라면, 잔뜩 위축된 모습을 오히려 가슴이 찢어질 슬퍼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삶을 누리고 영위하기보다는 삶으로부터 퇴각하는 것처럼 보이고 사는 고통을 말하지만 살지 않는 고통, 혹은 사는 척하는 고통을 말해야 지경이다.

P.126

 

테리 이글턴은 우리는 함께 어울려 사는 일상의 질이 어떤가에 따라 구원받는 존재라고 했다. P.127

 

내가 나를 발견하는 것은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 속에서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나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관계 속에서 자기 얼굴을 만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의 초상화이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상 남의 눈치나 보면서 주눅 들어 살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죽지만 미리부터 죽어 있는 것처럼 필요는 없다. 힘을 내고 싶다, 바로 이렇게.

P.128

 

아버지, 우리는 태어났죠? 서로 삶을 헤쳐가도록 도와주기 위해 태어난 같습니다. 우리 모두 순간과 장소를 바람직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해냅시다.

P.132

 

'사람의 마음은 깊고 이상할 정도로 얕다. 사람은 얕음으로 살아갈 있다.' 

P.133

 

각자 자신들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끄집어낼 사는 맛이 난다.

시간은 좋다. 세상은 수없이 힐링을 말하지만 나에게 힐링은 서로의 좋음을 나누는 것이다. 좋은 대화와 좋은 생각을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다. 나와 남의 관계는 나와 나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좋은 대화를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시선으로 나를 보게 만든다. 나를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는 생각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다음에 일곱번째 항목에 있는 말을 외칠 있다면 정말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해낸 일이 너무 좋다!"

버거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각자 현재를 구원하기 바랐다. "어떻게요?" 그에게 묻는다면 그는 '사소한' 구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호시노 미찌오가 얕음이라고 표현한 그것, '사소함'이다. 버거는 마른 한다발과 찬물로 하는 아침의 세수, 오래된 길을 걷는 소박한(사소한) 행복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사소한' '시시한, 별것 아닌, 하찮은' 혼동하곤 하지만 카프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일상뿐이고 '사소함'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P.134-135

 

고통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현실 때문에, 하나는 자신 때문에. 몽떼뉴의 생각처럼 어떤 생각이 나를 갉아먹는다면 오직 나의 허락을 통해서만 그렇게 있다. 에드리언 리치가 말한 대로 우리가 상투적인 곳에 있다면 우리가 그곳을 택했기 때문이다.

나약해져버리면 자기방어, 자기비하, 자기연민의 에고를 억누를 줄도 다스릴 줄도 모르고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하기도 어렵다. 감상적이 되지 않고는 이야기하는 법도 모르게 된다. 받아들여서는 곤란한 것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지나치게 타협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되어간다. 손쉽게 초라해져간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와 에이드리언 리치가 각각 목소리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바보가 되고 싶지도 불행해지고 싶지도 않다. 리어 왕처럼 '결국 인간은 이것밖에 안되는가, 이런 것까지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나를 바보로 만들지 말아주시고 고귀한 분노를 갖게 해주소서' 맞설 있어야 한다. 솔론처럼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자을 지킬 알아야 한다.

나약해지지 않아야 지금 잘하고 있는 일을 앞으로도 있다. 나약해지지 않아야 자기를 과소평가하고 비하하는 대신 자기에게 엄격해질 있다. 자신부터 자신을 얕잡아보지 않아야 한다. 자신은 행동의 근거로, 본보기로 삼을 무엇인가를 찾으면서, 타인에게 구조요청을 보내면서 강아지, , 커다란 나무, 새소리, , 한밤중에 밝혀진 등불, 온갖 것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힘을 내왔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을 만한 친구와 한잔과 믿을 만한 시가 필요하다.

P.148-149

 

그렇다면 대체 리토스트란 무엇인가? 불현듯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고통스러운 상태이다. 치유책으론 사랑이 있다. 절대적 사랑을 받는 사람은 비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혹은 인간의 공통된 불완전성을 깊이 경험한 사람도 리토스트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목격하는 일은 흔하며 별로 흥미롭지도 않다. 따라서 리토스트는 청춘이나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의 장신구 같은 것이다.

P.158

 

진실은 적어도 무엇이 거짓인지 아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고 그것을 인정할 있다면 환상적인 해방감을 누리기 시작할 있다.

P.159

 

진리를 존중하면서 기만에서 벗어나고 자유로워질 있다면 나도 무엇보다도 진리를 사랑하고 싶다. 진리를 존중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게 있기를 바란다. 자기를 존중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P.162

 

그는 죽을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관대하고 용감하게 살았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졌을까? 그렇게 알아보았을까?

그가 '벤투의 스케치북' 문장이 떠오른다.

'자화상의 '(self)'라는 단어는 하나의 명사이기를 그치고 전치사 '- 향해(towards)' 역동성을 획득한다.'

그의 시선은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어딘가를 향했다. 많은 관심과 사랑과 축복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누구인가, 지상 어디에 말해지고 정당하게 평가받고 알려져야 것이 있는가, 드넓은 세계를 마치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듯 탐색했다. 바로 시선이 버거를 버거로 만들었다. 그는 내게 세상에 자아말고도 관심 가져야 것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덕분에 좁은 가슴에서 몇번이나 추락 직전에 겨우 탈출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버거에게 가장 크게 빚진 것은 시간관이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서 그는 시간은 선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환적인 시간관 안에서 우리의 자리는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다. 실수하지 말자, 말은 자아를 매사의 중심에 두라는 말이 아니다. 무엇이 우리를 둥글게 에워싸게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버거는 우리를 둘러싼 원에는 우리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목격할 있는 텍스트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와 자연과 우주의 텍스트들이 그렇다. 버거는 텍스트들은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과 공존하면서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는 기발한 방법이 있음을 확인시켜준다고 생각했다.

생각에 버거는 자신만 원을 만들기도 했다. 작은 우주라고 해도 좋다. 그림, 음악, , 햇살의 기억, 바닷가의 나무에서만 나는 특별한 소리, 친구를 찾아가는 , 한다발의 , 푸른 하늘, 죽었지만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은 사람들, 친밀하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로 원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원의 영향을 받으면서,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을 헤쳐나가고 자기 길을 걷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법을 찾아냈다.

P.169

 

상대방이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존중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무엇을 말하지 않는다는 , 그것은 한가지 관점에서만 중요하다. 그것이 삶을 진실되게 사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P.177

 

어떤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는다면 이야기는 나의 일부가 된다. 앞으로 모습에 보태어진다. 나는 나를 이야기할 이야기를 하고 싶다. , 나는 어떤 이야기가 불명하기를 원했는가? 어떤 이야기가 계속되는 기여했는가?

P.183

 

'비록… 했지만,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다.'

문장은 이미 살아온 때문에 생긴 마음속 슬픈 회한 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시간 위에 내려앉았고, 내가 자신의 미래에 관심을 두고 염려하는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P.186

 

"중요한 아무것도 없다면, 지켜야 것도 없는 법이란다."

P.188

 

한때 사랑했고 마음을 두었던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걸까? 그만큼 반갑고 나고 신나는 일이 있을까?

그런데 책의 제목은 '시선들'이다. 모든 글이 아름답지만 제목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된다. 자신만의 경험, 어려움, 관심사, 슬픔, 기쁨을 통과하는 우리의 문제 많은 , 우리를 애태우는 , 지쳐빠지게 하는 , 삶을 꿋꿋하게 살다보면 어느날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시선'이란 생각이 든다. 현실을 직시하되 다른 결론에 이르는 시선.

P.208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은 고독한 셀프테라피가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확장되는 것이다. 시선으로 세상을 보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제아무리 낡은 세상이어도 오래된 세상에 새로운 관계와 시간과 공간은 무한히 싱싱하게 탄생하고 있었다.

P.214

 

모순된 감정덩어리에 불과한 우리들이, 모호함을 견뎌내야 하는 우리들이 자기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있는 , 어떤 정체성을 갖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대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책만큼 답이 분명하기도 힘들 같다. 책들의 말미에 가장 중요하는 등장하는 문장은 '(삶에) 형태를 부여하다'이다. 내가 삶과 이야기에 형태를 부여할 있는 것은 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관한 이야기를 때이다. 나에 대해서 말하자면 네가 필요하다, 네가 이야기에 끼어들어야 한다. '' 이야기를 '' 이야기에 연결할 있어야 한다.

P.217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여기는데, 우리의 힘은 다른 곳에, 충직함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힘은 우리 친구들 안에도 있으며, 친구들이 사라지면 우리의 힘도 일부 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P.221

 

나는 답을 사랑과 우정 안에서 찾았다. 내게 사랑에 관한 최고의 정의는 '서로 시간을 합치는 '이다. 둘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산산이 흩어졌을 시간을 합치고 합쳐서 우리가 만나지 못했더라면 시도하지 못했을 어떤 일을 해낼 있다면, 관계 안에서 각자가 분발할 있다면, 각자가 세월이 흐를수록(옛날이 좋았어, 아니라) 더욱 새로워질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후회 없이 축하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일 최고일 있었다."

"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내가 아닐 거야."

이런 순간 사랑과 우정은 가장 진실한 존재방식이다.

사랑과 우정에 다른 목적은 없다. 서로 친밀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외에는. 서로 친밀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외에는. 모리스 블랑쇼의 말이 생각난다. '비록 덧없을지라도 그녀 안의 무엇인가가가 웃는 소리를 듣길 원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나탈리라는 이름을 지켜주고 싶었다.'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동시대에 태어나야만 하고 만나야만 한다.

P.224-225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중요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확장이다.

P.232

 

"사람은 정말 변할 있을까?"

", 믿어. 조건이 있어. 애써 피했던 질문을 다시 만나기로 마음먹으면……."

P.235

 

이런 질문은 우리가 한번이라도 맞게 대답할 없는 질문이 세상에 널려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P.239

 

욕망은 전혀 관용이 없다. P

P.242

 

덧없는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있다. 덧없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혼자 견디게 내버려두지 않을 있다. 덧없는 우리가 도시의 삭막한 골목마다 꽃을 심는 손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덧없는 우리가 타인의 희망일 있다. 우리의 외롭고 폐쇄적이고 부서진 마음을 사랑과 꿈이 얼마든지 합쳐놓을 있다.

P.246

 

영혼은 변함없이 혼란이고 모순이고 경멸할 만한 것이지만 매우 심오한 것일 있다. 소설에서 그는 진실한 말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

진실한 말은 이렇게 주어진다. '우리는 풍요로움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과 부족함으로 글을 쓴다.' 우리의 말도, 목소리도 그렇게 다가오고 주어진다.

  1. 249-250

 

우리에게는 견디는 사랑, 버티는 사랑, 관대한 사랑, 퍼주는 사랑, 파격적인 사랑, 셈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랑, 초연한 사랑이 필요하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우리 각자는 고통을 느끼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다. 우리 각자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다.

P.250

 

 

고통은 분명히 전에는 보던 것을 보게 해준다. 고통과 슬픔도 미덕이 있어서 사랑할 대상을 알려주고 맥베스의 교훈을 빌리자면 진짜 욕망을 깨닫게 한다. 나르시시즘으로 가득한 정체성을 분쇄할 기회를 준다. 천국은 지난날의 정체성이 지난날의 문제가 , 당신이 누구였는지가 더 이상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닌 곳이라면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해내야 일이 있다. 문제의 해결은 오로지 변화 속에만 있고 자신을 극복해야만 변화할 있다.

P.256

 

'인간의 삶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한번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인간이 죽을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진지하고 진실해질까 상상을 해봅니다. 가령 한번 죽고 두번째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한번 상상해봅시다. 우리의 삶을 에워싼 많은 부질없는 것들을 걷어내버릴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자신을 진실하게 바라볼 있는 시간을 선물받은 것입니다. 남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이죠." -자코메티

P.263

 

우리의 숙명은 죽음처럼 의심할 여지기 없는데, 여전히 의심스럽고 확실한데 그것이 언제일지 확실치 않은 것과 함께 사는 것이다. 언제일지 없으므로 매일 생각할 필요도 없고 적절히 잊고 산다. 그런 우리가 정색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과연 걸까?;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해지는 또다른 세계가 우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매일 죽어가고 있다. 매일 죽어가고 매일 태어나고 있다. 자코메티야말로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진실하게 있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매일 탄생의 기적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 태어나고 있으므로 매일매일을 어제보다 특별하고 흥미로운 날이라고 생각했다.  알퐁스 도데는 스스로 수십통의 자기 부고를 작성하면서 삶과 죽음을 묵상했다.

P.276-277

 

에이드리언에게,

                   오늘밤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요

친구에게 전화를 하듯이

                    혼령에게 전화를 하듯이 말이죠

당신이 여생 동안 무얼 하려는지 물어보려고요

가끔 당신은 마치 남은 시간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죠. 당신이 그럴 걱정이 돼요.

(…)

당신이 마음속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남은 인생에 대해

어떤 생각이라도 하기를 바랍니다.

                                                   자매애로,

 

                                                       에이드리언이

 

                         - <모순들, 흔적을 따라> 중에서

P.278-279

 

사람들은 자연으로 눈길을 돌리는 걸까. 알래스카 들판을 걷는 그리즐리 한마리에서, 영하 50도의 혹한에서 지저귀는 박새에서 우리는 눈길을 떼지 못할까. 아마도 우리는 곰이나 작은 새의 생명을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의 생명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에 대한 관심이 다다르게 되는 종착점은 자기 생명, 살아 있다는 것의 신비일 터이기 때문이다.

P.284

 

우리가 무엇인가 된다는 것은 다시 없는 시간 속에서다. 신비는 이렇게 현실 속에, 잊을 없는 이야기 속에, 잊을 없는 미지의 속에, 잊을 없는 얼굴 속에, 다시 시간 속에 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워져 사물 하나하나를 자세히 바라보고 싶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느끼고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소중히 사랑하고 싶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는 숨쉬는 조건을 조금 밀고 나가보는 , 그것이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라고 에이드리언 리치는 읊었다. 덧없는 삶을 기적이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은 필요없다. 믿고 사랑하라. 상대방의 호흡을 느껴라, 라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말했다. 이런 감정들만이 찰나를 넘어 영원할 같다. 호시노 미찌오 책의 제목이 '영원의 시간을 여행하다' 이유를 조금은 알겠다.

우리의 시간 속에, 영원의 흔적이 있다. 우리는 시간을 여행 중이다.

P.285-286

 

 

우리는 질문을 구하고 대답에 따라 살려 하지만 릴케는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을 기다리되 질문에 따라 살라고 했다.

P.290

 

우리의 향수는 지나간 날들에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지금 미소를, 아름다움을 서서히 삶을 잃어버리는 중이라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리는 것이 있으므로 얻는 것도 필요하다. 긍정할 것이 필요하다. 긍정할 것이 많지 않은 사회에서 무엇을 긍정하느냐는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태도이다.

P.298

 

괴테가 말했듯 인생은 시처럼 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겪더라도 결코 우리에게도 하나의 인생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일을, 다시 한번 기회가 있기를 바라는 일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P.334

 

 

용기가 필요한 즈음이었다. 책이 출간된 것은 페이스북에서 팔로워하고 있는 분의 소개 덕분이었으나, 작가라면 언제라도 읽을 용의가 있으므로. 그리고 소개글은 예전에 내가 작가의 책을 읽고 써놓은 서평의 같기도 했다. 책은 공감되고 아름다우며 글이란 내게 그런 설렘을 주지만 현실은 그보다는 어렵다는, 매일 직장에 가서 일정량의 그다지 재미없고 적성에 맞다 수도 없는 일을 하고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며 거기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을 수밖에 없는 점점 잃어버려가는   같은데 내가 잃어버리는 뭐냐고 그게 현실과 무슨 상관이 있냐 물으면 제대로 답할 수도 없는 지경인 그런 상태를 개탄하며 서평에 대한 같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책을 미뤄두고 펴든 책이다.

 

여전히 나는 같은 데서 허덕이고 있었기에, 내게 책은 용기를 내라고 했다.

그런 말은 많이 듣고 잘도 까먹는데

예를 들면 예전에 친구가 말인데, 어느 동화에서 나온다 했었다. 용기를 가지고 친절하게, 아니면 기적이 이뤄지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데렐라에 나오는 대사 같은, 말을 들을 때는 힘이 불끈 솟았는데 금세 까먹고 마음을 다시 일깨워준다. 좀더 상세하게, 직관을 넘어서 여러 예시를 들어가며.

, 용기를 내서 친절하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책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내일 죽을 수도 있다. 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 혹은 그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해본다.

 

읽을 책이 엄청 많아졌는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