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게 자리가 있다면 내게로 올 건가요?
나는 어린 시절 양조위를 좋아했다.
이상형이었다.
그가 나온 영화들을 많이도 봤다.
처음 그를 본 영화는 <해피투게더>
당시 국내 상영불가 판정을 받았었다.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우연히 영화제인지에서, 광주 고딩이던 나는 그 영화를 꼿발 딛고 봤다
고 기억하고 있다.
상영불가라서 극장에는 사람이 넘쳐났고
앉기는 커녕, 서서 사람들 틈 사이에서 겨우 그 영화를 봤는데
그날 밤 정말 그 영화 생각만 했다.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계속 생각이 났다.
뿌연 흑백화면 속 이과수폭포라든가 하는 장면들이
의미의 연결도 없이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첫사랑 같은 일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정말
첫사랑처럼 그 영화가 왔다.
이후 왕가위 영화를 찾아보며
지루한 고등학교 생활의 활력소를 찾아냈다.
비디오테입을 돌려서 중경삼림, 아비정전, 동사서독을 계속 봤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하고 싶은 어떤 정서
가 그 안에 있었다.
아니, 분명 나도 느끼는 건데
어른이 되면 더 선명해지는 무언가가 그 화면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나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라카미 하루키와 왕가위와 엑스파일을 통해 배웠다.
화양연화는 내가 본 왕가위의 마지막 영화다.
그뒤로 몇 편 더 그의 영화가 나왔지만
내게 어른이라는 게 얼마나 쓸쓸할 수 있는지
얼마나 자기가 할 말을 다 못하고 사는지
그런 채로 사는 게 삶이라고 알려준 영화의 마지막은
화양연화였다.
말하자마자
양조위가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나뭇잎을 덮던 장면이 떠오른다.
며칠 전 집 앞 천변을 지나가다
피자 가게에서 틀어놓은 비디오에 양조위가 나왔다.
내 이상형이었던 남자다
라고 생각한 뒤
이 대사가 떠올랐다
"내게 자리가 있다면 내게로 와줄건가요?"
화양연화에서 장만옥의 대사
따라할 수는 없지만
장만옥이 했던 중국어 특유의 그 억양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음악에도 나와서인지도 모르겠다.
(왕가위는 음악을 선곡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내게 자리가 있다면 내게로 와줄건가요?"
이제 그 말을 왜 혼자 하게 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올해는 앙코르와트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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